Category : 무덤


명사|||문화유산 금막용(琴漠龍)은 조선 인조(仁祖) 14년 병자호란때 형제들과 함께 쌍영진에 출전하였던 인물이다. 당시 두 형을 적에게 잃어 형의 군복 소매로서 조혼을 하였다. 후일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이 되었으며 조정에서 공신록권(功臣錄券)을 내렸다.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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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문화유산 김치중은 조선 선조(宣祖)때 수많은 왜적에 항거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항거치 못하고 차라리 왜적에 포로로 잡혀 고역하기보다는 죽는 편이 낫다하고 절벽에서 투신자살하였다고 한다. 당시 치화(致和), 치홍(致弘)이라는 두 동생도 향리의 용사들과 규합하여 항거하였으나 도저히 만회할 수 없어 자살하였다. 묘는 자연석으로 쌓은 단 위에 조성되었으며, 앞에 묘비가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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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박주상은 1830년 예천에서 태어났다. 충효를 생의 기본으로 지키며 학문에 전력하여 사림들의 존경을 받았다. 1895년 일본이 민비를 시해하자 사재(私財)를 털어 각 사림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65세의 고령으로 대장에 추대되어 다른 의병장 김하락, 이강년 등과 상호 연락하여 북진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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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부론면 노림리에서 599번 지방도로를 따라 흥호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좌측으로 금단부락(검단이)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약 800m정도 가면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마을의 오른쪽 산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에는 장명등 1기, 동자석 2기, 문인석 2기, 상석, 촛대 2기가 놓여 있으며, 신도비는 묘소 아래의 민가 뒤에 위치하고 있다. 비는 대석과 비신, 그리고 쌍용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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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이정(李楨)은 조선 명종 때 학자, 자는 이강(而剛), 호는 귀암(龜岩)이다. 어려서는 규암(圭岩) 송인수(宋麟壽)가 사천에 귀양살이 할 때 수학하였고, 만년에는 퇴계 이황, 이도암 문하에 출입했으며 『성리유론』과 『경현록』을 편집하였다. 그가 죽은 뒤 1602년 고향에 귀산사(龜山祠)을 세우고 비석에 그의 생애를 기록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파헤친 것을 현 위치에 개장하였다. 묘갈명은 미수(眉壽) 허목(許穆)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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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정세아(鄭世雅)는 조선 중종(中宗) 30년(1535)에 영천(永川)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호수(湖○)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의번(宜藩)에게 “군부(君父)가 몽진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초간(草間)에서 살기를 구하겠는가”하며 대오(隊伍)를 짜고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 900여명을 모집하였다. 병사(兵使) 박보(朴普)가 그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다시 초론사(招論使) 김성일(金誠一)이 각읍의의장(義將) 중에서 그를 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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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최강(崔堈)의 형 최균(崔均)의 묘소로서 최균은 호를 소호(蘇湖)라고 했다. 천문지리(天文地理)에 통달하여 풍운대(風雲臺)라고 했다. 수문장(守門將)에 임명되었고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도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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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문화유산 김석진(1843-1910)은 조선 철종 11년(1860)에 과거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서 1901년에 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항의 상소를 하여 을사오적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음독 자살했다. 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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